top of page
KakaoTalk_Photo_2023-11-06-23-48-28 005jpeg 복사.jpg


노화랑 개인전  2023

너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비추고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물에 비춰진 나의 모습에 너무나 심취하여 그 물속으로 빠져버린 나르시스처럼, 격정적이지는 않겠지만 내가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 사고를 넘어 즉각적으로 나는 누구일까라는 가장 현실적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누군가에 보여지고 있구나… 라는 것은 나에 대한 깨달음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정체성의 혼란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나의 얼굴은 나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다. 물이나 거울 같은 반사체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결국,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감정적 이입이 가능해 짐으로써 빠르게 사회화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과학적 소통 방법인 언어와 문자 그리고 직립보행으로 자유로워진 손이 크게 한 몫을 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인류는 나를 비추는 무엇인가를 통해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되었고, 그 답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더 이상 거울에 비춰진 나, 개인의 질문이 아니게 되었다.

어린 시절, 거울을 바닥에 놓고 그 속을 들여다 본 경험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천정이 보이고 그 천정이 보이는 거울의 공간에 비쳐지는 세계에서만큼은 내가 절대적이었다. 날 수도 그리고 빠르게 그 공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한 자신감이 생겼었다. 당시에는, 세상을 뒤집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상상이었겠지만, 거울에는 언제나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놓여져 있었던 것 같다.

이열 작가의 거울은, 그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비추고 있다기 보다는 어쩌면 거울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있었을 역사를 반사적으로 나에게 비춰주고 있는 것 같다. 거울 속의 또 다른 거울.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유명인이기도 하고, 르네상스 시기 어느 궁에서 홀로 쓸쓸히 사라져 갔을 누군가의 초상이 바로 작가의 거울 속의 거울이다. 죽음을 두고, 지금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의미로 ‘바니타스’는 삶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오히려 이 삶을 얼마나 헛되게 하는지를 묻는다. 그 상징으로 거울이 등장한다. 이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나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성찰의 매체이기도 하다.

이열 작가의 거울에 담겨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시간을 넘나들고 싶을 정도의 깊은 그리움이다. 그가 처음으로 거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역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수 많은 시간 동안 어머니의 얼굴을 담고 있었을 낡은 어머니의 경대에서부터 그의 거울 작업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거울은 많은 사람들의 지난한 삶의 역사를 우리가 직접 볼 수 는 없겠지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작가는 오래된 거울 프레임을 복원하고 재생하면서 당시에 그 거울을 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금의 감성으로 새롭게 이어왔다. 역사적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액자들을 복원해 내는 작업은 상당히 예민하고 지난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을 통해, 작가는 당시의 문화를, 그리고 트랜드를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들과 당시 예술활동의 범위 내지는 방법들을.

거울이 단순하게 나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시대의 어느 한 장면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오늘 아침 샤워를 하며 비춰본 나의 거울에 나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그리고 역사는 나의 거울을 어떻게 해석하게 될 것인지, 너무나 당연하게 숨쉬는 것처럼 나를 비추던 모든 것들에 이제 조금은 더 진지하게 그 앞에 서야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임대식 디렉터

bottom of page